조선 왕조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산 해경궁 홍씨.

조선 왕조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산 해경궁 홍씨.

 

조선 왕조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산 해경궁 홍 씨.

 

 

이번 영상은 해경궁 홍씨의 시점으로 영상을 제작해 보았습니다.

영상을 시청하기 앞서 구독과 좋아요 많이 부탁드리겠습니다.

 

해경궁 홍씨는 홍봉안과 한산부인 이 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해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 선조와 임모강우의 딸인 정명

공주의 아들 홍만용의 증손자로 원래 망실과 깊은 인연이 있는 명문가집안이었습니다.

해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정조의 어머니라는

영화로운 자리에 오르면서도 남편과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친정 가문의 몰락까지 지켜봐야 하는 기구한 운명을 살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해경궁 홍씨가 세 잡인이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었습니다.

영조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기존 세력들과의

균형을 고려했다는게 정설로 받아들여집니다.

 

 

영조는 당시 화두의 옳은 탕평책과 분당 정치로 골머리가 아팠고

그녀의 아버지인 홍봉안이 비교적 영조와 갈등이 적은 온건파 노론에 속했습니다.

 

 

 

노론을 떠나 영조는 특히나 홍봉안을 아꼈습니다. 당시 영조는

유능한 인재를 가렸는데 매우 집착하는 군주였습니다.

 

 

홍봉 아는 해경궁 홍 씨의 성적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

개인 능력과 성품이 뛰어난 인물이자 문신 실무가였습니다.



그렇게 1744년 겨우 열 살이 된 홍신은 사도세자와

혼인하여 세자빈이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의 군궐에 들어간

그녀는 왕실의 엄격한 예복과 기유를 익혀 나가야 했습니다.

조선 시대 왕실 여성으로서 그녀에게는 후사를 잊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고 동시에 세자를 내조하는 현명한 아내가 되어야 했습니다.

 

 

다행이라면 초기의 혼인 생활은 비교적 평온했습니다.

사도세자는 총명하고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해경궁 홍씨 역시 지적이고 현명한 여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둘 사이에서 1752년 훗날 정조인 이산이 태어나 왕실은 축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평온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사도세자가 커가면서 영조와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해경 홍씨는 그 중심에서 고통받기 시작했습니다.



영조는 완벽 주의적이고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반면

사도세자는 자유분방하고 예술적 성향이 강했습니다.

이러한 성격적 차이는 정치적 견해 차이와 만물력

부자간의 관계를 점점 악화시켰습니다.

해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이 시기의 어려움을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인 사도세자와 시아버지인 영조 사이에서

중제자 역할을 하려 노력했지만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만 갔습니다.

사도세는 일마다 영조의 참견을 받아야 했고 대리 청정 중에도

 

 

영조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도세자의 행동은 점점 기해졌고

영조의 분노는 더욱이 커져 가며 그렇게 1762년 이모화 변이 일어납니다.

 

해경궁 홍씨의 인생에서 가장 아물 한 순간이었습니다.

해경궁 홍씨는이 참혹한 순간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남편이 시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모습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봐야 했던 것입니다.



아들이었던 이산도 아버지를 살려 달라며 홍시며 영조며

바지가랑이라도 붙들어야만 했는데 그 나이가 고작 열 살이었습니다.

해경궁 홍씨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고

그녀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해경궁 홍 씨는 절망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어린아들 정조가 있었고 그 아이를

지켜내야 하는 어머니로서의 사명이 있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단순히 영조만의 영향이 아닌

영조를 지지한 노른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나경원의 고변이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정조 역시 제위 기간 암사를 당했다는 기록이 있었을 만큼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때문에

해경궁 홍 씨는 지압을 잃었음에도

더욱 신중하고 지혜롭게 처신해야 했습니다.

1776년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해경궁 홍씨는 대비해 지위에 올랐습니다.

아들이 왕이 되었지만 그녀의 고민은 오히려 더욱 깊어졌습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고 명예를 회복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정치적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이었죠.



대표적으로 싶아와 벽파의 대립이 심각하게 전개되면서

전국이 요동쳤던이 시대에 해경궁 홍신은 아들을 뒷받침하면서도

가문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어려운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1793년에는 경상도 지역 남인들이 사도세자의 의리와 효성을

천양하자는 영남만 인소를 올리면서 사도세자 문제가

다시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했습니다.

1795년 해경궁 홍 씨가 회갑을 맞는 해에 그녀는 자신의 회고록인

한중록을 저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은 한 번에 쓰인 것이 아니라

10 수년에 걸쳐 여러 번 쓰였으며 각각의 목적과 대상이 달랐습니다.

 

 

정조는 어머니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행궁에서 성대한

회갑 진찬례를 베풀었습니다.

 

신분을 빼앗기고 폐서인 되거나 죽지 않으면

군궐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왕실 여성의 신분으로

이런 식의 외출을 해본 여성은 혜경궁홍 씨가 유일했습니다.

 

1800년 정조가 종기와 열병으로 약 한 달간 투병 중에

승하하면서 해경궁 홍 씨의 삶에 또 다른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도 잠시 더 큰 문제는 정치적 상황의 급변이었습니다.

정조사우 벽파의 황국의 이은 싶아의 공격으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했고 당시 해경궁 홍 씨도 벽파의 공격으로

동생인 홍나김이 죽고 친척이 유배당하는 타격까지 받았습니다.



어린 순조가 즐기했지만 실권은 정순 왕우와 벽파로 넘어가게 되면서

해경궁 홍 씨의 친정홍 씨 일가는 싶아의 핵심 세력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평생을 왕실에서 보낸 해경궁 홍 씨였지만

이때만큼은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불안한지 절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후일 손자가 자라면 자기 집안을 신원해 주길

기대하는 바람으로 증거이자 호소문 성격에 글을 썼습니다.

 

이것이 그녀가 남긴 한중록의 또 다른 집필 동기이기도 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를 겪으면서 해경궁 홍 씨는 더욱 고립되었습니다.

친정 가문의 몰락과 정치적 소해 속에서

그녀는 오로지 손자 순조의 성장을 지켜보며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어린 순조 역시 정수왕후의 수렴청정 하에 있었기

때문에 해경궁 홍 씨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이 시기 해경궁 홍 씨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깊은 성찰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폐자빈으로 들어와 대비가 되기까지

그녀는 조선 왕실의 영광과 비극을 모두 경험했습니다.

남편의 죽음, 아들의 고내, 손자의 즉, 그리고 가문의 몰락까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그녀의 삶은

1815년 12월 15일 8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