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의 힘순찐이었던 이명박. 현대건설에서의 그의 생애

 

 

 

지난 2편을  경부 고속도로 비하인드를 다뤘는데요, 경부 고속도로가 현대 건설이 주도적으로 추진한 만큼 여기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 한 명 더 있어 가지고 와봤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17대 이명박 대통령입니다. 이명박은 주변 사람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일 하나 만큼은 잘했다고 하며, 정주영 회장의 말로는 그가 근면성실하고 부지런하기로 그 누구보다 앞섰다고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65년 24세에 현대 건설 평사원으로 입사해 3년 만에 과장, 과장을 달고 1년 만에 부장, 그리고 30살에 임원 이사 자리를 꿰차는 등 대한민국에서는 전대미문이라는 정도로 초고속 승진을 했습니다. 그리고 불가 5년 후, 정확히 35세에 현대 건설 사장이 됩니다. 물론 엄청난 운이 따랐을 수도 있겠지만, 이명박은 평사원으로 입사해 정확히 11년 만에 사장직에 올랐으며, 11년 후 현대 건설 회장직에 오르게 됩니다.

 

 

 

 

 


그가 이렇게 초고속 승진을 하 된 명분은 어쩌면 충분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잠깐 이명박 대통령의 과거를 살펴보고 가보겠습니다. 정확하진 않으나 이명박은 공부를 딱히 좋아하진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학창 시절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를 했는데, 남들처럼 공부방에서 공부를 한 것이 아닌 낮에는 일당직을 해가며 일이 끝난 야간의 합숙소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당시 이명박은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로부터 "잠 좀 자게 불 좀 끄라는 핀잔을 자주 듣곤 했다고 합니다. 그 노력의 결과는 그를 고려대학교에 입학하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이명박은 지금에 비해 과거의 업무 강도가 훨씬 셌을 테니, 그 점에 있어선 대단한 사람인 건 틀림없어 보입니다. 이명박은 고려대학교에 입학하고 바로 학교를 자퇴할 생각이었으나, 1학기는 맞춰야만 학적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당시 이명박은 흙수저 중에 흙수저라 할 정도로 가난했으나, 일각에는 이명박이 가난하지 않았다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서울로 올라와 일용직을 전전긍긍한 것과 더불어 입대 시기가 다가오자 신체 검사를 받게 되었는데, 그는 오랫동안 공사판에서 일한 까닭일까, 축농증과 기관지 확장증이 지병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폐병이 결핵과 같은 지병이 흔할 정도였으니, 공사판에 오래 종사한 이명박의 경우 호흡기 질환과 같은 지병을 피해갈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군의관이 이명박의 몸을 보고 "20살 밖에 안 된 몸으로 어떻게 이런 성한 몸을 갖고 있냐"라며 오히려 입대를 거부하는 일화가 있으며, 남들은 군대를 빼기 위해 인맥을 동원했지만, 이명박의 경우에는 생활고에 허덕여 오히려 군대를 가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이명박에게 인생의 위기는 있었습니다.



이명박이 고려대학교 3학년을 복학할 때였는데, 박정희 정부 당시 한일 수교를 강행한 것에 대해 이명박은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직을 통해 6.3 항쟁에 가담해 시위를 버렸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시위를 억제하고자 계엄령을 선포하며 이명박에게 수배령을 내리게 됩니다. 결국 이명박은 징역 3년에 처하며 출소 후에는 어머니인 최태원 씨가 심장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인생의 전환점이라 밝힌 이명박은 현대 건설에 입사하기 위해 시험을 치렀지만, 필기 합격에도 전과 기록으로 하여 최종 입사에서 탈락하게 됩니다.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젊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일어서려고 하는 것을 막는다면 국가가 영원히 책임지게 될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보냈으며, 이를 본 박정희 대통령과 당시 민정비서관 인 학삼이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명박의 배포가 남다른 것을 떠나 정주영 회장은 이명박을 합격시킨 데에는 "색감만 녀석이 눈 하나만큼은 똘망똘망하다" 이유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현대 건설에 입사한 이명박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초고속 승진은 물론 경부 고속도로 건설 당시 이명박이 과장 직급으로 현장 감독을 맡게 되었는데요, 그는 당시 현장을 보면서 "경부 고속도로는 전투와 같았다"며 회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정주영 회장이 "이익을 남기는 길은 공사 일정 단축밖에 없다"는 말에 공기를 앞당기자며 800만 달러를 투입해 중장비 14대를 도입하는 것을 보고 공사 당시 현장에 쏟아부은 정주영 사장의 열의는 대단한 것이었다며, 그가 야전 침대에서 담요 한 장을 덮고 노숙하면서 장처럼 일에 열중했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그러나 경부 고속도로를 준공하는 과정에 확실한 공을 세운 건 어쩌면 이명박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명박이 현대 건설에 입사를 하면서 그해 태국 파타나 고속화도로 수주를 따냈고, 이는 초기 현대 건설에 입지를 다졌다고 볼 수 있으며, 경부 고속도로 준공 당시 실제로 태국의 기술력이 큰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태국에서 공사 당시 폭도들이 공사 중에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때 금고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이 이명박이 있었으나, 정주영 회장이 말하기를 "여러 직원 중 한 명이었을 뿐이었다"라고 해고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한 가지 정주영 회장의 말에 따르면 이명박은 경부고속도로 감독직을 맡긴 했으나, 당시 야망의 세월로 이명박이 급부상하게 되면서 모든 것들이 이명박의 손에 일어난 사건들이라 생각했지만, 실질적으로 경부 고속도로의 모든 것은 정주영 회장과 박정희 대통령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또한 소양감댐 박정희 사건과 같은 부분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알고 있는 것도 몇 없었고, 실질적으로 평사원 정도의 업무를 맡고 있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명박의 위기는 한 차례 더 있었습니다. 이명박이 현대건설 사장을 재임 중이던 때 이라크 건설권 수주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당시 중동에서 전쟁으로 인해 공사는 하고 미수금을 받지 못해 대금 회수의 차질이 빚어졌는데, 그 금액이 무려 2억 달러, 당시 1조 3,700억 원의 엄청난 비용이었다. 지나고 2000년도 현대 건설이 부도난 원인 중 하나로 많은 언론들이 앞다퉈 기사를 다뤘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이명박을 초고속 승진을 시킨 데에는 그가 부지런하기로 으뜸이었고, 근면 성실이 승진으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명박의 경우 회사 일을 하면서 사적으로 이익을 취한 적이 없고,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은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하였습니다.

 

영상으로도 다뤘으니 시청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주역이었던 정주영 회장 (현대건설)

전 포스팅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경부 고속도로에 목숨을 건 사람은 또 있었습니다. 오늘의 영상은 정주영 회장의 시점으로 경부 고속도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영상을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newwould.tistory.com